학술활동

9,000원의 인연 (이정엽원장)


[Doctor"s Essay]

9,000원의 인연

피부과 전문의 이정엽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보면
아사코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던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 떠오르고...
불교라는 종교가 떠오르기도 한다..
"인연이면 다시 만나겠지"
미팅 때 그다지 끌리지 않는 파트너를 만나게 되면 굳이 AFTER를 하고 싶지 않은 내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운명론적 발언이 생각나기도 한다..

어찌됐건 불교라든지, 운명론자 라든지...
두 가지 모두 나라는 사람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뚜렷한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는 부활절에 나눠주는 알록 달록 삶은 계란에 현혹되어 교회에 다녔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기독교 봉사써클에서 활동 했고, 전공의 시절에는 카톨릭의 봉사 단체에 섞여 봉사 활동을 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사람 사이의 만남에 대해서는 인연을 믿는다..
특히 남녀 사이의 인연에 대해서는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인연이 깊은 상대를 만나지 못해 초라한 솔로임을 객관적으로 드러낼 때 나의 철학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몇해 전.. 아침에 바지를 입을 때마다 허리춤이 빡빡한지 넉넉한지 하루에 한번씩 체크해보던 어느 날이다.
그만큼 체격이 튼실했던 것이 아니라 부실했던 탓이었다...
탄탄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살찌기 작전의 일환으로 잠들기 전 햄버거를 하나씩 먹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어느 밤...
햄버거를 한 개 사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어렴풋하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적이 드문 야심한 시각, 좁은 골목길...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포에 뒤를 돌아볼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안에서 커다란 울림이 들려왔다..
"돌아보지마, 돌아보지 마라 말이야"
그러나..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변화의 핵은 호기심이라 했던가...
휙~ 뒤를 돌아본 순간...
한 젊은 스님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그 야심한 시각, 달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던 스님의 머리...
어렵사리 눈을 맞춘 내게 스님은 하동까지 가야 하는데 일행을 놓쳐 차비가 필요하니 돈을 빌려달라는 말과 거절 당하면 어쩔까.. 하는 안타까운 눈빛을 내게 건넸다..
스님이 나를 바라보던 몇 초 사이에 내 머리 속에는 몇 가지 생각이 레인보우처럼 펼쳐졌다..
"서울에서 하동이라.... 그렇게나 많이?"
"혹시 요즘엔 스님을 가장한 앵벌인가?"
돈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순간, 문득 예전에 TV에서 수도사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먼 곳의 목적지를 향해 무전여행으로 찾아가는 과정을 본 기억이 뇌리를 스쳐갔다.
혹시 스님의 경우가 그런 경우라면 모른 척 지나간 오늘을 땅을 치고 후회할 수 있으리라...
주머니를 뒤적여 먼지까지 털었지만 달랑 9천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으로 9천원을 스님께 드렸더니 스님의 근심 어린 얼굴이 한 순간 펴지며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며 어떤 방법으로 9천원을 돌려 드릴지 내게 연락처를 물어 오셨다...
그제서야 나는 일말의 경계심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그때 주시지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리라...
인연이라는 단어가 뇌리 속에서 윙윙대며 귓가를 맴돌았다.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지만 뭐라고 규정 지을 수 없는 안도감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난 나지막이 소망한다...
내 삶의 주변을 배회하는 수많은 인연들과 끈을 놓지 않다 보면 90의 나이에도 단아한 품위를 잃지 않으셨던 피천득 선생... 그 분의 인생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맡게 되지 않을까..
메마른 현대인의 삶도...
소중하고 끈끈한 인연들로 인해 좀 더 풍성하고 윤택할 수 있음을 머리로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